2017년 9월 27일 수요일

패션 아이템으로서의 책



책이 패션 아이템이 된다면 어떨까

'어머 저 사람 저런 책을 읽나보네'

혹은

'저 사람, 괜찮은것 같은데?'

외적인 것이 아닌, 내면에 끌리는 세상.

혹은 그 반대일수도

2017년 9월 24일 일요일

피파 17 pc 협동모드 온라인으로 하기 how to play fifa coop online

피파17기준 온라인 협동 가능한 방법입니다 (추후 버전에서도 가능할 듯)
1:1 은 두 사람이 피파를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지만 같이 편을 먹기는 쉽지 않습니다.
co-op season 으로 플레이 가능하나 플레이어가 적기 때문에 플레이가 힘듭니다.

one player season 에 guest 를 invite 하여 같이 플레이 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오프라인으로 하나의 컴퓨터를 사용한다면 컨트롤러 Y 를 눌러 guest 로서 함께 플레이 가능하나 온라인으로 함께 하고 싶은 경우에 사용 가능한 방법입니다.
간절히 이 방법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정보 공유합니다.
피파는 한 사람만 있어도 가능합니다.

준비물
컴퓨터 A
- fifa17 이상이 깔려 있어야 함 (16 지원 미지수)
- geforce gpu 가 달려 있어야 함 (예전 gpu 는 확인 필요)
- geforce experience 지원하는 그래픽 드라이버 설치
- 컨트롤러 A

컴퓨터 B
- 크롬 브라우저
- 컨트롤러 B

방법
1. 컴퓨터 A 에서 fifa 를 실행
2. alt+z 를 눌러 stream->플레이 공유->초대->컴퓨터 B에서 초대를 수락
3. 오프라인 단판 플레이 -> 컨트롤러 설정 창에서 5초간 기다린 뒤 A에 꽂혀있는 컨트롤러 A를 뽑는다(컨트롤러 B 가 1p 로 설정됨)
4. 컨트롤러 A 를 컴퓨터 A 에 꼽는다 -> 2p 에 컨트롤러 A 세팅됨
5. 온라인 시즌에서 컨트롤러 B가 Y 버튼을 눌러 invite 하여 같이 플레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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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paration
Computer A
- fifa 17~
- geforce gpu
- geforce experience-support graphic driver
- controller A

Computer B
- chrome Browser
- controller B

Method
1. ComA play fifa17~
2. alt+z -> stream->play share->invite com B through e-mail -> Com2 Accept
3. play offline 1:1 -> 5 sec wait at controller setting screen -> unplug controller A (controller B is p1 now)
4. plug controller A to com A -> 2p is controller A
5. press invite button Y (controllerB) at online-season
6. play

2017년 9월 18일 월요일

크레마 사운드 배터리 관리 어렵다 (설계의 문제)

크레마 사운드 + 플립커버 사용 3주째.

개발 업체가 대기업이 아니다보니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스마트 디바이스보다는 엉성하게 설계되고 제작되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만 사용함에 있어 전원 관리에 치명적인 불편함이 있었기에 정리해본다.

1. 플립 커버를 닫아도 닫혀있는 것이 아니다 (배터리 관리가 안된다)

플립 커버라 함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덮개형 케이스. 다른 디바이스들이 플립을 닫을 시 작동을 안하듯, 닫으면 크레마 사운드가 슬립(sleep) 상태로 전환된다.

그러나 플립커버가 크레마를 100% 슬립 시켜주지 않는다. 닫아도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 때문에 항상 한두번 다시 열어봐야되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닫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마음 편하게 쓰고 싶어서 구매한 플립 커버는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추가적으로 사용하며 확인한 불편한 점을 열거해본다.

첫째. 플립커버를 닫은 상태에서 실수로 전원버튼이 눌린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화면이 켜진다. 사용자는 알 방도가 없다. 백라이트 덕분에 배터리는 줄줄 샌다. 사용하지 않는 일정 시간 뒤에 꺼져야 하는데도 계속 주인몰래 켜져 있어 방전이 된다.

둘째. 플립커버를 닫은 상태에서 충전케이블을 꽂는다면? 슬립이 풀린다. (후략)

셋째. 플립커버를 닫은 상태에서 충전케이블을 뽑는다면? 슬립이 풀린다. (후략2)

결론. 기기를 재우고 싶어도 계속 깨어난다. 잘 자는지 계속 확인이 필요한 아기와 같다. 플립을 닫아놓고 이틀 뒤에 방전되어 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언제 깨는지 울음소리라도 내줬으면). 제조사에 문의해보니 완충상태의 기기는 슬립 시 5~6% 배터리가 소모된다고 하였다. 일정시간 지난 후 슬립하도록 설정은 필수이나 이것 또한 제대로 작동하는지 의문이다.


2. 전원을 꺼도 꺼져있는것이 아니다

전원을 끈 상태에서 충전기를 꼽으면 전원이 바로 켜진다(켜고 싶지 않아도). 이퍼브 관리자는 이에 정상적으로 동작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017년 9월 17일 일요일

나의 대학원생 시절

대학원에 와서도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대학교에서의 방황은 나 홀로 감내하면 되었지만, 대학원의 방황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을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해야 했고,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경우 문제가 생겼다.

대학원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들어서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공부가 싫은데 대학원에 가면 뭐가 달라지겠는가?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하루종일 게임을 했다. 대학원에서 시키는 일이 거지같고 짜증났다. 매일같이 혼났다. 자존감은 더욱 떨어지고 심신이 썩어가는 기분이었다. 대학원 수업 학점도 낮았고 연구 성과는 개판이었다.

더 이상 안되겠다 싶어 회사에 가려 했다. 그 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다. 회사는 힘들어 보였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도 당최 왜 이런곳에 오냐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대학원을 다니는 선배들은 공부를 즐거워했다. 선배들의 삶은 윤택했다. 공부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결심을 하고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대학원에 더 다니고 싶다고. 그러나 나에게 잔뜩 실망한 교수님은 이를 단칼에 거절하였다. 교수님을 찾아뵙고 졸업이 늦어도 괜찮으니 나를 더 관찰해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 때 결정해달라고. 합리적이었는지 교수님께서 받아주셨고 그때부터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

나의 대학교 시절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한살 먼저 대학에 입학한 케이스였다. 그 나이대에 한살 어리다는 것은 많은 차이가 있다. 정서적으로도 많이 어렸고 학문적으로도 많이 부족했다. 친구들은 수능이라는 시스템에 닳고 닳아 전과목을 포괄적으로 소화해 낸 친구들이었다. 나는 수학과 과학만 집중했고, 그것도 아주 부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명문대에 입학하면 그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내걸며 신나게 놀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해방이다 생각했다.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재밌다고 하는 친구들이 역겨웠다(이건 초등학교때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예능을 보고 컴퓨터 게임을 했다. 수업은 당연히 듣지 않았고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공부가 너무 하기 싫었다. 그러나 진도는 빨랐고 숙제는 버거웠다. 시험은 어려웠기에 공부할 것은 많았다. 고등학교때처럼 2~3주에 빠짝 공부해서는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늘 뒤쳐졌고 뒤늦게 시작하곤 했다. 공부를 즐거워하는 친구들 사이에 있는것도 굉장히 괴로웠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계속 압박했다. 집중은 되지 않았지만 책은 펴놓았고, 밤늦게까지 앉아있다가 새벽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났다 (방돌이가 굉장히 괴로워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라도 성적이 오를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성적이 오를리는 만무했고, 자존감은 계속 떨어져갔다. 공부를 잘 하는 친구들처럼 힘들게 수강신청을 하면 좀 더 열심히 할까 하여 빡세게 신청했다가 되려 독감에 걸리기도 했다. 물론 성적은 개차반이었고 갈수록 우울해졌다.

왠지 대학원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군대 문제가 컸다) 학부 마지막 즈음에 성적을 최대한 올렸다 (대학원에 입학하기엔 어려운 성적이었다). 성적이 거의 입학 불가에 가까웠지만 교수님이 받아주셨다. 다만 면접을 보아야 했는데, 학부 때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과목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기에 면접에서 두번이나 떨어졌다. 마지막 기회에 겨우 붙었는데 그 때는 면접 공부를 처절하게 했었다. 마지막 면접도 잘 보지 못했지만 지도교수님이 힘을 쓴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친구들은 다 명문고에 진학했다. 나는 유일한 루저였다. 일반고에 진학을 했고, 거기엔 명문고에 떨어진 친구들이 모여 있던 특수반이 있었다.

그때 많이 행복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학교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학원을 덜 간 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이 아닌가 싶다. 야자시간에 특수반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했던것이 너무 싫었다. 야자시간에 일반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가끔 일반 친구들과 같이 야자를 할 때면 너무 즐거웠다. 야자시간에 열심히 공부하고 친구들과 바람 쐬는 시간이 행복했다.

학교에서는 별로 배우는게 없었다. 특수반에서 가르쳐줬던 내용들도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갔고, 주말이나 방학이면 더 많은 학원을 다녔다. 명문대에 가야 했기 때문에 수학과 과학, 영어, 국어에 집중해서 학원을 다녔다. 고등학교 정도 되니 내가 살던 동네 안에는 좋은 학원이 없게 되었다. 더 큰 도시를 찾아가야 했다. 매일 1시간씩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학원에 갔고, 같은 시간을 들여 집에 돌아왔다. 집중을 하지 않아 배운것이 없으니 집에 와서 밤을 새 공부를 해야했고, 실제로는 밤만 샜다. 계속 잠이 부족했고 배운것이 없었던 생각이 난다. 힘들고 피곤하니 집중이 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원에서 유일하게 명문고에 가지 못했던 것은 나에게 큰 컴플렉스였다. 어떻게든 명문대에 가서 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열심히 내신을 챙겼다. 내신 공부는 정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내신은 기본이고 어떻게든 경시대회 수상을 해야 명문대에 갈 수 있었다. 수상 실적을 위해 수학 학원은 열심히 다녔으나 너무 어려워 이해가 잘 되지 않았고, 그래도 듣다보면 하나라도 배우겠지 싶어서 계속 앉아있었다. 앉아있었지만 집중은 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학원에서 중요하다고 가르쳐 준 내용이 있었다. 이건 꼭 알아야 한다길래 그 시간에 딱 집중해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대충 느낌만 알아뒀다. 다음 경시대회에 그 문제가 나왔다. 느낌만 알았기에 풀다 말았다. 나는 상을 받았다. 상당히 권위있는 상이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참가했을 정도니까. 나중에 알고보니 그 학원이 문제 유출로 유명한 학원이었다.

받은 상과 내신을 가지고 명문대학에 서류를 넣었다. 대학교 입학시스템을 확인해보니 내신은 사실 거의 의미가 없었다. 수상이 정말 중요했다 (추후 대학교에서 입학시스템 근로를 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상으로 학생들을 1차로 분류했었다.). 수상 실적이 워낙 좋으니 넣은 학교에서 모두 서류합격을 줬다. 남은건 면접이었다.

A 대학교는 문제를 보고 교수들 앞에서 문제를 풀고 설명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기출 문제를 보고 달달달 분석했다. 교수들 앞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 화이트 보드를 하나 걸어두고 계속 연습을 했다. 기출문제에서 풀지 못했던 문제들을 분석해보니 과거 학원에서 가르쳤으나 내가 공부하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열심히 공부했다. 물리 면접이었기 때문에 물리 공부를 열심히 했다. 예전에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알아야 했지만 나는 몰랐다. 면접 직전순간까지 계속 문제집을 보고 공부했었다. 아마 학원을 다녔던 모든 시간보다 그 때 공부를 더 많이 했던것 같다. 한달동안 스스로 공부했던 내용이 2년간 다녔던 학원보다 더 많았다. 면접 문제는 예상대로 나왔고 문제없이 면접을 치뤘다. 합격이었다.

B 대학교는 개인연구와 자유토론을 심사 기준으로 두었다. A 대학교에서 합격이 된 상태라 부담이 없었다. 간단한 물리 이론을 기반으로 연구를 생각했다. '속삭이는 회랑' 이라는 공간에 대한 내용을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그것을 기반으로 실험을 했다. 타원형 건물 내에서 한 정점에서 속삭이면 다른 정점에서 뚜렷이 잘 들린다는 내용이었다. 타원형 수조를 만들고 드릴로 진동을 만들고 수심을 바꾸고 진동수를 바꾸고 소리와 물로 현상을 측정해냈다. 정해진 답이 있었기에 거기에 맞춰 결과를 분석하면 되었다. 너무 간단했고 그저 하면 되는 일이었다. 내가 생각해 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건 연구가 아니었다. 그저 과학실습이었다. 그러나 그럴싸하게 포장하고나니 교수님들이 좋아들 하셨다. 토론의 경우 조급해 보이지 않도록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에게 발언권이 있을 때 소신있게 답하는 형식으로 간단히 치뤘다. B 대학교에서도 합격 통지가 날아왔다.

학창시절 내내 마음도 비어있었고 머리도 비어있었다. 몸은 지쳐있었고 의욕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대입 시스템에 맞춰 스펙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준비하니 합격할 수 있었다. 대입 시스템이 굉장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곧 나의 대학생활을 통해 드러난다.

나의 중학교 시절

중학교에 들어가자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졌다. 경쟁자들이 많았다. 한번도 전교 10등 내로 들어본 적이 없다. 난 늘 20등 즈음에서 머물렀다. 어머니는 그것을 싫어했지만 거기에 크게 혼나거나 한 적은 없었다. 역사나 사회 같은 과목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 과목들에도 목숨을 걸었다. 시험을 잘 못쳐서 유리창문에 주먹질을 해서 손이 찢어진 친구도 있었다.

그나마 내신에 거리를 둘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특수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이다. 특수 학원에서 죽싸게 수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이미 고등학교 수학은 소화하고 있었고, 경시대회를 나가며 수상했다. 한번도 큰 상을 받은 기억은 없다. 늘 동상이나 장려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성이 나의 전교 등수에 대한 excuse 가 되어 주었다.

방학이 되면 아침에 도시락을 싸서 학원에 갔다. 밤 12시까지 학원에 있었고 밤이 되면 집에 왔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학원을 가야 했기 때문에 자고 싶지 않았다. 매일 새벽 2시가 되어 스르르 잠들었다. 학원에 친구들이 있어서 그나마 다닐만 했다. 그 당시에는 특수학원에서 살았던 기억밖에 없다. 그곳이 나의 삶터였고 거기서의 사회 생활이 전부였다.

학원에서 집중해서 공부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늘 멍때리고 다른 생각을 했다. 가끔 기분 좋을 때 막 집중해서 성적이 높게 나오곤 했지만 전반적으로 낮았다. 하루는 선생님이 광학 시험을 치고 점수가 높은 사람에게 선물을 준다고 해서 열심히 해서 받아냈던 기억이 난다. 그 이외의 시간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나와 같이 학원을 다녔던 친구들은 늘 나보다 점수가 높았고 나보다 좋은 상을 받았다. 다들 좋은 고등학교에 갔지만 나는 가지 못했다.

나의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6학년)

4학년부터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본격적으로 모든것들이 시작되었다.

선수반에 들어가면서 2~3시간동안 수영을 했어야 했고, 못할 시 물고문을 받고 배 근육이 터져라 물에서 발차기를 했다. 수영을 갈 바에 죽는게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매일 5시가 오지 않기를 기도했다.

수학 전문 학원을 다녔다. 반 배치고사를 봤는데 그 당시 자존심이 세서 "에이 이거 쉽다" 라고 얘기를 했던 생각이 난다. 근데 그렇게 시험을 잘 보지 못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창피했었다. 지하철 역 옆에 있던 학원이었기에 매일같이 드나드는 지하철을 보며 수학문제를 풀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곧잘해서 상도 받고 했던 기억이 난다.

5학년부터 수학경시를 하는 특수 학원을 다녔는데, 완전 수준이 다른 곳이었다. 중학수학은 우습고 수1, 수2까지 배웠다. 인수분해를 못하면 야구배트같은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았고 귀를 깨물렸다. 맞기 싫어서 목숨걸고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이때부터 어지간한 폭력은 우스워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수 학원에서 배우는 영어는 또 달랐다. 의미 단위로 끊어야 되며, 수식하는 부분은 화살표로 가리키는 표시를 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혼났고 영어가 아주 복합한 법칙 내에서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어를 수학처럼 배웠지만, 영어는 수학보다 예외가 많았고 규칙도 많았다. 그때부터 영어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장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설사를 하고 아침을 먹으면 게워냈다. 내가 비위가 약하고 장이 약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다들 급식을 먹는데 나 혼자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수영대회에서 상도 받고 수학대회에서 상도 받고 학교에 플랜카드도 걸렸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좋아하고 친구들도 날 부러워 했다.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당시 찍은 나의 영상에 나는 한숨을 깊이 쉬고 있었다. 유년시절에 웃고 떠들고 까부는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매일 한숨쉬는것으로 아버지에게 혼났던 기억이 난다.

나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3학년)

눈높이 학습지는 꾸준하게 했었다. 눈높이 수학에서 슬슬 눈높이 과학, 눈높이 영어, 눈높이 한자까지 소화해야하는 범위가 늘었다. 눈높이 과학은 실험 과목이 있어서 집에 실험집기를 두고 선생님과 실험을 했던 기억이 난다. 눈높이 과학수업이 제일 좋았고 눈높이 한자가 가장 싫었다. 수학도 좋아했었지만 풀어야 할 문제량, 진도 속도를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높이면서 하기싫어졌다. 덕분에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학생 중 하나였다.

이때도 꾸준하게 수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수영이 좋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적이 없다.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방과 후 수업에 바이올린이 있었다. 손가락이 아팠고 재미가 없었다. 끔찍이 싫어했던 기억은 없었다. 좋아하는 친구도 별로 없어서 그닥 하고 싶지 않았다.

1학년때에 영어학원을 다녔다. 원더랜드 영어유치원이었는데, 나보다 1~2살 많은 형 누나와 함께 다녔다. 원어민 선생님이 있었고 중간중간 정글짐 같은 곳에서 놀았던 기억이 난다.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않았고 까불면서 수업 분위기를 해쳤고, 원어민 선생님께 혼나 울면서 집에 갔던 생각이 난다. 별 생각없이 다녔지만 혼나고 나서부터 너무나 다니기 싫었다.

친구들이랑 놀았던 기억은 별로 없다.

나의 유년기 (~유치원)

어린 시절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4살 까지는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늘 웃었던 기억이 난다. 매일매일 신나있었고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신도시로 이사를 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학습지를 하기 시작했다. 눈높이 수학 학습지를 했었다. 나는 문제들을 곧잘 풀어냈다. 그때는 그 학습지가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로드가 크지 않았다.

유치원에서 영어 수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집에서 영어를 어머니로부터 배우기도 했다. 유치원에서 dragonfly 라는 단어를 봤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한 곡을 배우면 30번씩 연습으로 쳐야 했다. 연습을 할 때마다 동그라미를 쳐야 하는데, 너무 치기 싫었기에 한번 치면 다섯번씩 동그라미를 쳤다. 한곡을 치고 한번 동그라미를 치는 것과 다섯번 동그라미를 치는 것은 동그라미 모양에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한번 치고 그리는 동그라미는 정성껏, 크고 아름다운 동그라미를 치지만 후다닥 그리는 다섯개의 동그라미는 얇고 기울어져 있다. 선생님은 이것만 보고도 학생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학생들은 다섯번 치고 다섯번 동그라미를 쳤다고 또 거짓말을 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즐겁게 배웠던 기억은 바늘시계를 읽는 법을 배웠던 20~30분여간의 시간이었다. 피아노 학원에는 방 안에 하나의 피아노, 혹은 여러 피아노가 배치되어 있는 닭장과 같았다. 학생들은 그 닭장에 앉아 열심히 피아노를 치고 열심히 동그라미를 쳤다.

글쓰기 학원도 다녔다. 아마 피아노 학원 다니기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무엇을 배웠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거벗은 임금님 만화를 봤던 기억만 난다. 글쓰기 학원이 끝나면 바로 미술학원으로 갔다. 나는 자동차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한번 그림을 그려보라고 해서 신나게 자동차를 그렸다. 2차원적으로 자동차를 즐겨 그렸던 나는 "자동차는 입체이므로 3차원으로 그려야 한다" 라는 이야기를 듣고 시무룩했다. 내가 그린 자동차 위로 3차원 선을 이어 새로운 자동차를 만들어냈다. 나는 그것이 멋진 자동차로 보이지 않았다. 그 이후로 자동차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정말로).

글쓰기 학원을 그만두고나서 수영을 하기 시작했다. 수영은 그렇게 좋지도, 그렇게 싫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얕은 수영장에서 물놀이 하듯 간단하게 배웠다. 수영이 끝나면 그 건물에서 구연동화를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

유치원 가기 전 집에 있던 패미콤으로 게임을 하며 놀았을 때,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놀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